1 솔직하고, 단순하고, 낙천적이다. 아니, 그건 너무 긍정적인 평가인가? 누가 들이부은 흙탕물을 뒤집어 써도 넉살좋게 웃는 양 하며, 밖에 태풍이 몰아치는데 돌아가면 조선소 일꾼들이 좋아하겠다느니 말하는 것을 보면 그냥 대책없는 낙관주의자가 아닌가. 무슨 일이 일어나도 늘 웃는 얼굴로, 때론 분위기 파악을 못한다고 핀잔을 듣지만 꿋꿋이 그런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잔뼈굵은 선원들은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다며 한탄하지만, 어찌저찌 일은 끊이지 않는 걸 보면 제법 인망은 있는 모양이지.
2 하긴, 놀라운 일도 아닌 것이 이 이등항해사는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친절하다. 자주 얼굴을 맞대는 이들은 물론 낯선 자들에게도 가능한 호의를 베풀곤 해서, 한번은 같은 배를 탔던 선장이 이유를 물어봤더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내게 객이고, 손님은 정중히 대접해야 하는 법이다’라는 식의 대답을 했다가 네 배도 아닌데 승객 운운 한다며 폭소를 유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나저나 가족도 친구도 아니고 손님이라니, 어쩐지 거리감 있는 호칭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옆에서 공짜로 술값을 내주는 것을 보다보면 혀를 차면서도 기분좋게 잊게 되는, 고작 그정도의 위화감이다. 면전에 대고 침을 뱉지 않는 한 제이 밀러는 당신에게 친근하고 정중하게 대할 것이며, 도움을 청하면 최대한 성의껏 살펴줄 것이다. 그나마 보증을 안 선 건 옆에서 뜯어말리는 사람들의 공이라고 할까.
3 가족은 없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아주 어릴 적에 친지들과는 뿔뿔이 흩어졌고, 사리분별이 될 즈음에는 동생 하나와 아버지, 이렇게 셋이서 떠도는 생활을 했다는 모양. 그마저도 제이 밀러가 열댓살 되었을 즈음엔 일찌감치 동생은 잃어버리고 아버지는 오랜 떠돌이 생활로 얻은 병에 타나토스의 품으로 떠난 형편이었다. 잃어버린 동생에 대해서는 너무 옛날 일이라 특별히 수소문하는 기색도 없고, 그냥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거니 하는 모양.
4 잠깐, 그러면 저기 부두에서 제이 밀러에게 잔소리를 하는 단발의 조금 어린 아가씨는 누구냐고? 그야 물론 나이 지긋한 할머니와 함께 어린 동생들을 돌보는 루스 페이시 양이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저 웃음이 헤픈 이등항해사가 어디 가서 허튼 계약을 맺지 않게 돌봐주는 일등공신이라고 할까. 제이 밀러가 가족을 잃은 후 페이시 가족이 얹혀 사는 형편에도 기꺼이 자리를 내주었고, 제이 밀러는 항해사로 일하며 받은 봉급을 대체로 그들을 위해 쓰고 있다. 어째서인지 옛날부터 인연이 있는 것치곤 결혼 이야기는 전혀 없지만, 주변에 따르면 거의 가족과 같은 사이라고들 한다. 지금은 그들이 제이 밀러의 돌아갈 곳이다.
5 주로 엘리시온 본토와 할리카사 공국을 오가는 무역선이나 화물선을 타고 다니지만, 그걸 감안해도 젊은 나이에 비해서는 다녀본 곳이 꽤 많은 편이다. 떠돌이 생활을 해서 그런가, 카스텔노바, 몬트레이븐 같은 본토의 도시는 물론이고 알메이다나 아코스타까지도 가본 적 있다고 한다. 다만 북부 도시에는 발을 들여본 적이 없다는 듯. 마물이나 혼혈에 대해서도 소문만 들었지 잘 아는 바가 없다.
5 선원이 되기 전까지는 다양한 일을 하며 먹고 살았다. 오페라 극장 청소부, 구두닦이, 신문팔이에 세탁부며 주점의 급사까지. 1 피니언이라도 벌 수 있다면 가리지 않고 뭐든 했다. 먹여 살릴 가족이 있는 사람이 으레 그렇듯이. 본격적으로 선원 생활을 하게 된 건 아버지의 죽음 후, 할리카사로 돌아가기 위해 몰래 숨어든 배에 걸려 잡일꾼 노릇을 하면서부터다.
6 즐기는 것은 노래와 춤, 그리고 술. 고상한 무도회장이나 오페라 극장에서 볼 것과는 비교도 안되지만, 바닥을 두드리는 스텝은 경쾌하고 출처불명의 노래도 흥겹게 한다. 즉흥적으로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 장기라면 장기.
만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다보니 싫어하는 것은 거의 없지만 딱 하나, 9라는 숫자를 꺼린다. 미신을 믿는다는 점에서는 어쩔 수 없이 뱃사람일까. 우습게도 제이 밀러의 생일은 9월인지라, 매사를 낙관하면서도 그 부분만큼은 푸념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7 공부에는 영 소질이 없다. 초급 아카데미도 중퇴한 마당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그나마 수학에는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 외의 학문은 아는 바가 전무한 수준. 이제 측량이나 뱃일 할 때 필요한 지식 말고는 거의 모른다. 본인도 공부를 하려는 의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뭘 해야할지 막막한데다 집중력도 없어서 도통 진척이 없다. 아마 누구든 이 인간을 가르치려면 대단히 인내심이 좋아야 할 텐데…
8 그런 사람이 한 명 있었던가. 그래, 그 사람. 조 비노슈.
십여 년 전에 키만 웃자란 채 다른 학생의 손에 끌려 야학에 들어온 그 곱슬머리 학생을 혹 본 적 있다면, 그 시절에는 좀 더 조용하고, 웃음기 없는 소녀-혹은 소년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때도 공부머리는 영 없어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인생에서 그나마 성실하게 무언가를 배우려고 시도했던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중하지 못하고 종종 수업시간에 딴짓을 하기도 하던 불성실한 학생을 그 선생님이 어떻게 보았을지는 과연 모르겠지만…
아, 그래도 받아쓰기만큼은 언제나 만점이었다.